본 문 : 예레미야애가 3장 19절 ~ 33절
제 목 : 하나님의 본심
(이번주는 동영상 녹화를 못했습니다. 텍스트로 대체합니다.)
[내 마음]
사람들이 본심을 몰라주면 참 답답합니다. 변명하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라면 참 억울하기도 합니다. 누구나 몇 번쯤은 이런 경험 있을 것입니다. 자식이 부모 본심 알기도 참 어렵고, 특히 부부간에는 상대방의 본심을 모름으로써 많은 불화가 싹틉니다. 목사와 성도 간에도 본심을 몰라주면 참 서운하고 참 힘이 듭니다. 그렇다고 내 본심은 이렇다고, 저렇다고 때마다 일마다 구구절절이 말하기도 힘들고… 그냥 벙어리 냉가슴 앓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런 마음을 표현한 동시가 있습니다.
곡식이라면
땅 속에 묻혀 단잠을 자고
파랗게 올라와
너를 위한 양식이 될 텐데
꽃씨라면
오래 기다려 껍질을 벗고
환하게 피어서
너와 함께 즐거움이 될 텐데
네가 나를 몰라 줄 때면
내 마음
땅 속에 묻었다가 꺼내고 싶다
(김옥배, “내 마음”, 전문.)
시인은 사람들이 몰라주는 마음을 “땅 속에 묻었다가 꺼내고 싶다”고 말합니다. 두 가지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그냥 숨고 싶고, 도망하고 싶고, 현실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고, 다른 하나는 “단잠을 자고” “껍질을 벗고” 새로운 존재가 되어 자신을 오해했던 사람에게 다가가고 싶다는 아주 긍정적이고 진취적인 마음입니다. 하지만 곡식도 아니고, 꽃씨도 아니어서 그렇게 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감추지 않습니다.
본심을 알아주지 못하면 그렇게 답답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누군가 내 본심과 내 진심을 알아준다면 그것처럼 기쁜 일이 또 없을 것이고요.
[분위기의 반전]
오늘 우리가 읽은 예레미야 애가는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본심을 알아가는 과정과 하나님의 본심을 알았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애가(哀歌)는 슬픈 노래입니다. 따라서 예레미야 애가는 예레미야가 부른 슬픈 노래입니다. 예레미야는 왜 슬픈 노래를 불렀을까요? 자신의 조국 이스라엘이,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남왕국 유다가 바벨론에 멸망하는 현실을 스스로 선포하고 또 그 현실을 목도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이 겪은 현실에 대한 고통과 아픔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나를 어둠 안에서 걸어가게 하시고…”(2절) “나의 살과 가죽을 쇠하게 하시며 나의 뼈들을 꺾으셨고…”(4절) “나를 어둠 속에 살게 하시기를 죽은 지 오랜 자 같게 하셨도다.”(6절) “다듬은 돌을 쌓아 내 길들을 막으사 내 길들을 굽게 하셨도다.”(9절) “내 몸을 찢으시며 나를 적막하게 하셨도다.”(11절)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말합니다. “활을 당겨 나를 화살의 과녁으로 삼으심이여, 화살통의 화살들로 내 허리를 맞추셨도다.”(12-13) “나를 쓴 것으로 배불리시고 쑥으로 취하게 하셨으며 조약돌로 내 이들을 꺾으시고 재로 나를 덮으셨도다.”(15-16) 20절에서는 “내 마음이 쑥과 담즙을 기억하고 낙심이 되었다(소태를 먹은 듯, 독약을 마신 듯합니다-공동번역)”고 말합니다.
그런데 21절에서는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다”고 합니다. 분위기가 갑자기 확 바뀝니다. ‘그것’이 대체 뭐기에 예언자는 “그것이 나의 소망이 되었다”고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19절의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입니다. 한마디로 삶의 고난입니다. 그것이 소망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축복과 기적과 행복이 아니라, 삶의 고난이 소망의 밑거름이 되었다니?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을까요? 달라진 분위기는 계속됩니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22)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23)
어떻게 이런 반전이 일어났을까요? 고통과 아픔으로 탄식하고, 울부짖던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변할 수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본심]
간단히 말해서, 예언자가 하나님의 본심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33)”
그렇습니다. 본심을 알면 모든 오해와 고생이 한 순간에 풀리는 법입니다. 얼마 전에 이런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마지막 기회”라는 짧은 글입니다.
/ 며칠 전부터 오빠에게 전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홀로 칠 남매를 키우느라 고생하신 엄마. 어느 날 그러는 엄마와 싸우는 오빠에게 대들다가 나는 뺨을 맞아 오른쪽 청각을 잃었다. 결국 나는 오빠에게 등을 돌렸고, 남편 따라 미국에 온 뒤로는 남이 됐다.
/ 여기저기 수소문해 오빠 전화번호를 알아냈다. 망설이다 전화를 걸었지만 신호가 가는 동안에도 별 생각이 다 스쳤다. 이내 힘없는 오빠 목소리가 들여왔다. 당황해서 오빠는 말을 잘 잇지 못했다. 어색한 대화가 오간 뒤 전화를 끊으려는 찰나 오빠가 말했다. “지금까지 너한테 미안한 마음으로 살았다. 부디 용서해다오.” 순간 나는 주저앉고 말았다. “나도 잘 한 것 없어요. 오빠… 목소리가 안 좋은데 건강 잘 챙기세요.” 나는 그렇게 허탈했다. 40여년 만에 듣는 오빠의 사과가 내 마음의 상처를 다 치유할 수는 없었다. 전화한 것을 후회하는 한편, 약해진 오빠 목소리가 마음에 걸렸다.
/ 며칠 뒤 올케 언니의 전화를 받았다. “고마워요. 고모한테 전화 받은 다음 날 오빠 편안하게 가셨어요. 위암으로 고생하셨거든요. 오빠가 얼마나 기뻐했는지 몰라요. 늘 고모에게 마음의 빚이 있다고 했는데…”
/ 나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 짧은 대화가 지상에서 오빠와 화해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니. 내가 조금만 노력했더라면 얼마든지 한쪽 귀로도 오빠의 진심을 들을 수 있었을 텐데… 후회로 가슴이 미어졌다. 이미 끊어진 수화기에 대고 나는 울며 말했다.
/ “오빠, 정말 미안해. 나도 용서해 줘.”
진심을 알고, 본심을 알기가 힘들어서 그렇지 그것을 알고 나면 삶의 고난과 아픔도 한 순간에 물거품처럼 사라집니다. 이런 일이 우리들 가운데에서도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삶이 힘들고 아파도 하나님의 본심은 우리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삶의 고통에 대한 태도도 달라지고, 사는 게 훨씬 수월해지지 않을까요?
예레미야 선지자는 자신의 또 다른 글에서 이런 말도 합니다.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그것은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요, 장래에 소망을 주려는 생각이라.”(렘29:11) 하나님의 본심이 어떠함을 말해주는 좋은 구절입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41:11)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이 모든 구절이 하나님의 본심이 어떠함을 나타내주는 소중한 말씀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당신의 본심을 가장 결정적으로 나타낸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의 본심, 즉 ‘인자와 긍휼’ ‘자비와 사랑’이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자신을 낮추신 하나님이시고, 인간을 하나님의 신성에 참여시키기기 위해 스스로 인간의 몸이 되신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고통과 아픔의 자리에서 우리와 함께 고통을 당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어찌 표현하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하나님의 본심을 경험했습니다. 저주가 아니라 축복을, 멸망이 아니라 구원을, 지옥이 아니라 천국을 예비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티끌에 입맞추라 - 삶의 긍정]
하나님의 본심을 깨달은 예언자 예레미야는 이렇게 고백하기에 이릅니다. “사람은 젊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27) ‘멍에’ 곧 ‘십자가’에 대한 시각이 근본적으로 달라졌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대의 입을 땅의 티끌에 댈지어다.”(29) 무슨 의미일까요? ‘땅의 티끌’은 바벨론의 침략으로 성전이 무너지고 삶의 터전이 타국/타인에 짓밟힌 역사적 현실을 의미합니다. 웅장하고 화려한 건물이 다 무너지고 먼지만 풀풀 날리는 현실. 따라서 땅의 티끌에 입을 대라는 말은 지금 겪고 있는 현실을 받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삶을 긍정하라는 뜻이지요. 예언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자기를 치는 자에게 뺨을 돌려대어 치욕으로 배불릴지어다.”(30) 치욕마저도 받아들이라는 얘깁니다. 삶에 대한 절대 긍정이지요!
겁이 납니다. 이런 말들을 또 하나의 율법으로 받아들일까봐 겁이 납니다.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해야 한다는 무거운 계율로 여길까봐 걱정이 됩니다.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땅의 티끌에 입을 맞추고, 치욕마저도 받아들이라는 것은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하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우리의 의지로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아니 그럴 마음이 없습니다. 어떻게 삶의 고통과 아픔에 입맞출 수 있습니까? 죽어도 못합니다. 아니 죽어도 그러기 싫습니다. 어떻게 치욕으로 배불릴 수 있습니까? 어떻게 자존심을 꺾으며 명예에 손상가는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죽으면 죽었지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그것이 인지상정 아닌가요?
하지만, 그럴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본심을 아는 것입니다. 그때에만 우리는 삶을 긍정할 수 있습니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 때에만 우리는 고통스러운 현실에 입을 맞출 수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본심을 안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삶의 이면에 감추어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한 계획과 아름다운 뜻을 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본심의 결정체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삶의 십자가를 기쁘게 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나보다 먼저 내 삶의 고통의 현장에 임재하시고, 나보다 먼저 그 고통을 아파하시고 눈물 흘리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면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내 삶의 “땅의 티끌”에 입맞출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삶의 지난한 여정 어느 길목에서 문득 고백하게 됩니다. “아, 지금 내가 겪는 고통, 이제까지 앓는 아픔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선물이구나!” 이런 고백을 담고 있는 구절이 바로 28절입니다. “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 그에게 메우셨음이라.” 아 나의 멍에, 내 삶의 십자가는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것이로구나. 지금 당하는 고통과 아픔, 쑥과 담즙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은총이요 배려로구나! “아,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구나!”
그런 사람은 자신의 삶의 밝음만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그늘도 사랑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삶의 기쁨만이 아니라 삶의 눈물도 사랑할 것입니다. 아니 눈물이 없으면 진정한 삶의 기쁨이란 없다는 것도 깨달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마침내 다른 사람들의 삶의 그늘을 찾아가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아름다운 삶을 새롭게 시작할 것입니다. 이런 사정을 읊은 시가 있습니다.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그루 나무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맑고 눈부시다.
나무 그늘에 앉아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면
세상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기쁨이 아니다.
사랑도 눈물 없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
나무 그늘에 앉아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의 모습은
그 얼마나 고요하고 아름다운가.
(정호승, “내가 사랑하는 사람”, 전문.)
그리고 또 다른 시인과 함께 이런 확신을 노래할 것입니다. “봄바람은 / 꽃을 피우고 / 가을 바람은 / 열매를 맺게 하듯이 / 살아감 속에 아픔은 / 그만큼씩의 / 행복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용혜원, “살아감 속에 아픔은”, 부분)